인사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노정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신자로 부르심을 받아 별다른 사명을 띄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톨릭의 일개 예비신자가 믿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논하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이가 돼지 앞에서 코를 뒤집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되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나는 무엄하게도 사도 바오로의 편지의 문체를 따라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짓은 주님이 시키신 게 아니라 그냥 재미있자고 해보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교의 원죄론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매우 다른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죄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원죄론은 사람이 납득하기 몹시 어려운 것입니다. 원조 아담의 교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 지은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은 사실 일종의 픽션입니다. 모든 사람이 원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논증하여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는 믿지 않는 자에게뿐 아니라 믿는 자에게도 그렇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기, 혹은 태중에서 죽는 아기들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어떤 아이들은 내전과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태어납니다. 열두살을 채 넘기기도 전에 손에 총을 들고 폭력과 증오를 배웁니다. 여자 아이들은 할례를 당하고 남자 아이들은 마약을 운반합니다. 원죄론을 논증하기 위해 이런 아이들에게마저도 죄의 뿌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더욱 지저분한 죄악입니다.
원죄론은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계시교리이며, 그리스도교인인 이상 우선 믿어야 하며, 믿으면서 의심함으로써 우리 삶의 건강함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원죄론이 옳다는 것을 그 자체로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죄론을 머금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해줄 수는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육체의 건강과 금전적인 풍요와 자녀들의 번창함에서 주님의 은총을 느낍니다. 하지만 회의하면서 믿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원죄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주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현대 도덕 사상에 대한 반론
실로 그렇습니다. 나는 내게 좋지 않은 성향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부터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어렴풋한 정도였습니다. 니체는 내게 위버멘쉬가 되라고 합니다. 나 자신을 초월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방침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입니까? 대지에 충실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니체를 비롯하여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내고자 애를 쓰는 여러 현대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책이 잘 팔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독자가 진정 얻어맞은 기분으로 자기 삶이 통째로 잘못되었다고 느낄 지경까지 몰아치지는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리뭉실한 표현과 절충된 해답이 나옵니다. 나는 대학시절동안 방황하며 제법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어떤 책은 마치 인쇄된 글자가 튀어나오는 것만 같은 생동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물 밖으로 나온 언어들은 그저 자기 관념 세계 속에서만 펄펄 날뛰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사나운 상어라 한들 바다 밖에 나오면 그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른바 현대적인 도덕 사상들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원죄론의 성격
그리스도교의 원죄론은 잔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딜레마에 빠뜨립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교만에 빠져있습니다. 그 교만으로부터 온갖 죄악이 이끌려나오고 그것은 사람의 생을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그의 영혼을 지옥에 처넣습니다. 현실에서 파국을 경험하지 못한 이를 위해 지옥은 그 몇백배의 처벌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연옥을 가르치지 않습니다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연옥을 교리로 인정합니다. 사람이 죄 없이 살다가 죽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것들에 대해 죽어서도 그 댓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렇다면 원죄론이 그 자체로서 나쁜 것입니까? 그것이 사람을 유약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함부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수 만드신 기도를 통해 우리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계십니다. 자기가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사람이 죄를 지었고 그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 그 자체가 부당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는 모처에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 속에는 "만약 성매매가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이라면, 성매매의 가격 차이는 성매매 여성의 숙련도 등에서 판가름되어야 하며, 따라서 나이가 많은 여성이 더 많은 소득을 올려야 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다르다. 짐작컨대 성매매 여성의 '가격'은 외모와 젊음, 그리고 피부색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짐작이지만 틀릴 것 같지도 않다). 이는 성매매 노동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남성들이 성매매를 통해 구입하는 것이 단지 성적 서비스가 아님을 시사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남성과 여성이 대등하지 않은 사회적 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는 한, 성매매 자체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라는 문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이익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남성들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인식이 수반하는 죄의식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당신이 말하는 여성주의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작 옳지 않은 것은 죄책감을 느끼는 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죄라고 느끼게 하는 주체가 올바르지 않다는 식으로 꼬인 사고를 합니다.
구조와 구성원의 죄책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그 속에서 이익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는, 그러한 구조를 깨닫는 순간부터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설령 자신이 손수 그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 않더라도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은 구조적인 문제에 눈뜨는 것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통증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팔과 다리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람은 모두 나면서부터 죄인이요 그리스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죄를 다 깨닫지도 못함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늘 죄책감을 느낍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를 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고 내 죄는 나의 탓입니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죄인이 아니라 수많은 죄인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은총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특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망가져 있고 구조적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락하였고 더더욱 썩어들어갑니다. 내 영혼 하나 건사하기도 힘에 벅찬 매일을 우리는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이 세상의 모습에 대한 나의 책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의 모든 잘못을 다 뜯어고치지 못합니다. 모든 죄에 대한 단죄와 교정은 오직 최후 심판의 그날 전능하신 천주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의 말을 오해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세상이 다 그렇고 그렇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은 썩었고 거기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죄악입니다. 서가에 꽂힌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해서 도서관에 들어가지도 말아야 한단 말입니까? 모든 메뉴를 일시에 먹을 수 없다고 해서 식당에 앉지도 말아야 합니까? 실천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라고 가톨릭 교회는 가르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갖지 못하는 믿음은 현대 도덕 사상가들이 말하는 인간의 완성만큼이나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공허한 믿음으로 인해 내면이 텅 비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마귀는 바로 그런 곳에 집을 짓는 일을 매우 좋아합니다. 자신이 진보적이라는 혹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만심이야말로 마귀에게 가장 든든한 방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죄책감과 그리스도인의 실천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를 꺼리지 마십시오. 잘못된 구조 속에서 희생자가 아닌 자는 모두 가해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책감은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부가적으로 느껴질 때에만 정당합니다. 스타벅스와 팔레스타인의 어린이의 관계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못 하겠거든 "니가 스타벅스에서 커피 사마시는 행위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 머리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짓이야" 같은 말 따위 하지 마시오. 자신도 모르는 것을 왜 남에게 가르치려 듭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죄를 갚는 것만으로도 힘겹습니다. 왜 이해하지도 못하는 구조의 문제를 끌어들여 남에게 몇 배의 짐을 더 지게끔 몰아붙입니까? 구조적인 잘못을 깨닫는 순간 어차피 사람은 죄책감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와 증거로써 문제를 깨닫게 할 일이지 그로 인해 부차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죄책감을 먼저 앞세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말이 움직이면 마차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그 말을 몰 능력이 없다면 다른 이에게 마차의 모습을 떠벌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죄책감에 눈뜨도록 하는 일을 꺼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죄의식을 들쑤시는 일에만 혈안이 된 자를 주님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어디 남의 죄의식 뿐입니까?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진보적입네 하기 위해 세상 모든 문제가 자기로부터 비롯하는 것처럼 고뇌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혐오하시던 바리세인의 모습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 전부를 구원할 수 없듯이 한 피조물이 모든 죄를 동시에 저지를 수도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 남들이 마구 떠들기는 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고 공감이 되지도 않는다면 차라리 무시하고 그냥 사십시오. 그 문제가 진정한 문제였고 그것을 지나쳐버린 것이 죄라고 해도, 프로테스탄트라면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으니 그래도 천국에 갈 것이고 나같은 가톨릭 신자라면 연옥에서 빡세게 구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되도 않는 죄의식을 강요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넘을 수 있는 한계를 망각하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교만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큰 죄입니다.
안부
이 새벽까지 기다려가며 신청한 사물함이 무사히 당첨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자칫하면 까먹고 잠자리에 들 뻔 하였으나, 주님의 은총으로 기억을 되찾아 일어났습니다. 이 방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을이가 문안합니다.
마지막 당부
하느님께서는 내가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내용을 조합하여 이러한 글을 쓰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이성과 자유의지를 주시어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두 어깨 사이에 목을 세워 주시고 그 위에 머리를 얹어 주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맹렬하게 사용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결코 반지성주의에 물들지 마시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반역이며 인류에 대한 배신입니다. 믿으면서도 믿음에 대해 고찰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좋은 사고의 훈련이 됩니다. 하느님의 평화가 그대에게 늘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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