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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오면 우리는 부자가 된다'라는 일종의 억견doxa이 있다. 마치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일반적 '상식'처럼, 이 또한 사람의 직관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실험 혹은 과학적 검증을 통해 반박되기 전까지는 사실이라고 굳게 믿어지고 있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아주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바로 저 '상식'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중상주의'를 논적으로 삼아,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현대 경제학의 토대를 닦은 책이다.
영웅적인 누군가가 외국에서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여 국내에 끌어옴으로써 우리 모두가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경제 논리'의 상당수가 바로 저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제학 자체가 저 신화에 대한 논박에서 출발하고 있으므로, 한국 사회의 '경제 논리'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경제학을 비난하는 것은 유령을 쫓아내는 대신 고스트 바스터즈를 해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황우석 사건의 '경제 논리' 또한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줄기교' 신자들의 관심은 대부분, 황우석이 벌어다 주겠다고 약속한 수십조원의 '국익'에 있었다. 문제는 그 국익과 부가가치가 국가 경제에 공헌하는 방식이 무어냐 하는 것이다. 소비가 촉진되고 내수 경기가 활성화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외화가 벌려들어온다 해도 그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그저 외환 보유고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지금 당장 한국이 시달리고 있는 내수 불황은, 아무리 외화를 많이 벌어오더라도 해결될 수 없는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학적 상식'이 현재 만연하고 있는 '경제 논리'를 압도하지 못하는 한, 황우석 식 대국민사기극은 언제라도 다시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경제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천박한 시선을 극복하려면, 경제학적 방법론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또 대중화되어야 한다. 과학적 방법론은 결국 대상을 탈신화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황우석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사회의 '과학 신화화'에 대응하는 방법 또한 결국 과학적 방법론의 보급일 수밖에 없듯이, 경제 신문의 1면을 매일 장식하는 그것들을 길들이는 방법은 결국 경제학을 통한 경제 논리의 탈신화화 뿐이다. 폴 크루그먼이 뉴욕 타임즈 칼럼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레토릭을 집요하게 해체하였듯이 말이다.
경제학과 과학 모두 '완벽하게' 객관적이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에 오염될 수 있거나 오염되었지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과학 그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젱가님의 리플 견해를 보고 이 포스트를 썼다. 글쎄, 위에 쭉 써놓은 바와 같이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황우석 사건은, 그곳에 동원된 논리마저도 경제학과 과학의 범주에 굳이 포함시키자면, 잘못된 경제학과 잘못된 과학이 어울어져 만들어낸 거대한 사기극이었을 따름이다. 그 사건을 통해 경제학과 과학의 진실성을 비판하는 것은, 체스터튼이 말한 바 "두 개의 검은 수수깨끼가 하나의 하얀 대답을 만드는Two black riddles make a white answer"것과 같은 넌센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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