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lman, Philip, The Scarecrow and His Servant, Knopf, 2005.
찰리와 초콜렛 공장을 읽고 로알드 달이 고평가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나는, 도서관 서가를 들락거리며 읽을만한 작가 어디 없나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작가가 필립 풀먼이었고, 처음 읽은 작품은 I Was a Rat! 이었는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탓에 이 사람 책을 쭉 훑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지금 한 서너권 빼고 다 읽었다.
블로그에서 한 두 줄로 평가할만큼 가벼운 작가는 절대 아니니 작가론은 나중에 공들여서 천천히 쓰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저녁 무렵 마지막 책장을 덮은 이 작품 얘기를 하려고 한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건 내가 읽은 풀먼 작품 중 단권짜리로는 최고다. 특유의 이야기빨이 끝까지 끊이지 않고 쭉 이어지는데, 특히 그들이 겪은 버드 무비 풍 모험이 마지막에 법정 드라마로 쫙 빨려 들어가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광경은 정말이지 일품이다.
이 작품을 높이 쳐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이야기를 몰아치면서도 인물들 사이의 감정이 오가는 찰나를 절묘하게 포착하면서, 작품을 시작하면서 제시한 도덕적 주제를 고스란히 간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나 다소 서먹한 주종관계를 이루던 허수아비와 잭은,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극히 신뢰하며 의존하는 사이가 된다. 그렇게 서로를 믿게 된 두 사람(?)이 무인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피터 베일리Peter Bailey의 따스한 일러스트와 곁들여져,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애틋한 느낌을 자아낸다.
주제를 놓고 보자면, 풀먼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이것 또한 용기를 주 테마로 삼고 있는데, 그것이 시작하자마자 "Be couteous, and be brave, and be honourable, and be kind"라고 아예 대놓고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일관되게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표현되고 있으니 오히려 긍정적이다. 풀먼이 아니었다면 '허수아비 공'은 그저 허풍쟁이에 바람만 잔뜩 든 얼간이로, 잭은 몰개성하고 밋밋한 눈치 빠른 소년 정도로 묘사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풀먼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자신이 처음 제시한 미덕을 독자들에게 요란스럽지 않게 전달한다. 그가 제시하는 미덕virtue은, 그가 반 기독교를 표방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루이스의 그것보다 더 건전할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적어보기로 하자.
아무튼 The Scarecrow and His Servant는 훌륭한 페어리 테일(번역어가 마땅치 않아서 ㅡㅡ;;)이다. 풀먼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접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아직 한국어 번역본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설령 있다고 해도 원서를 구할 수 있다면 영어로 읽는 쪽을 권한다. 9~12세 아동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니만큼 절대 어렵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간간히 나오는 적절한 언어유희가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다소 소년 취향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모든 연령대의 독자들에게 충분히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추가: 구글링을 통해 발견한 인터뷰에 따르면, 저자는 허수아비 공을 단순하지만 고귀한 존재로 본다. 또한 그는 이 이야기가 결국은 허수아비와 잭의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인터뷰어가 읽은 출판 이전 판본에는 해적선 이야기도 들어있었다고 하지만 작가의 뜻에 의해 잘려나갔다. 그 결정에 오히려 편집자들이 놀랐다나. 구해서 읽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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