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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객관적으로도 어느 수준 이상의 탁월성을 갖춘 사람들이, 목소리의 톤을 낮춰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무제한으로 술을 마시며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들은 같은 정보를 제공받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많은 분야에 대해 대체로 타당한 견해를 수립할 수 있다. 이것은, 음주에 있어서 중용의 파괴만을 제외하고 본다면, 그리스인들이 향유했던 심포지움(향연)에 대한 기술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서 가감없이, 2004년 상반기에 한윤형의 자취방에서 벌어졌던 광경의 묘사이기도 하다. 한윤형은 당시에 자신이 썼던 글을 정리하며, 지금 돌이켜볼 때, 비록 흥분한 상태였지만 내용만큼은 대부분 옳다며 놀라워했다. 나는 그 말에 문자로 대답했다. 당시에는 흥분하는 것만이 이성적인 행동이었다고. 그때 무제한으로 술을 마시던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흥분해있었고 그래서 매일 술을 들이켰다. 당시 그 방의 분위기란 마치 막걸리를 증류하여 소주로 만드는 솥단지처럼, 뜨겁고 터질 듯 하면서도 알콜 농도 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문제는 그때와 같은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매일 미칠듯이 떠들면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아도(당시 나의 도서관 대출 기록은 매우 빈곤하다) 타당한 견해를 수립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짓을 다시 하는 것은 모든 여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택해야 하는 방법은, 인쇄술 발명 이후 언어생활의 많은 부분이 문자언어로 흡수된 이후의 것, 독서와 필기와 사색 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적 생산의 측면 외에도, 조직론이라던가 대인관계 등 많은 분야에서 철학적인 검토 이전에 방법론에 대한 모색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한윤형은 노사모가 정치 조직이면서도 정치 조직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순을 지적한다. 그러한 의문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그 주체들의 정치관이나 무의식에 대한 분석 이전에, 조직 그 자체를 지적으로 탁월하게 다루어보는 과정이 요구된다. 문제를 폭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2007년 1월 8일 오후 7시 53분 수고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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